나이가 들수록 문득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바로 친정엄마다. 젊을 때는 쉽게 지나쳤던 말과 행동들이 50대가 되어 돌아보니 모두 깊은 뜻이 있었다. 인생의 풍파를 겪으며 비로소 깨닫게 되는 친정엄마의 삶의 가치들. 가족을 향한 헌신, 평범한 일상 속에서 터득한 삶의 지혜, 그리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해온 중년의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요즘 50대가 되어 느끼는 친정엄마의 가치를 이야기해본다.
가족사랑 : 친정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
어릴 적에는 몰랐다. 엄마가 우리 가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헌신했는지, 그 조용한 수고가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를. 그저 당연하게 여겼다. 식사 시간이 되면 따뜻하게 차려져 있는 밥상, 새벽같이 일어나 싸주던 도시락, 겨울이면 꺼내주던 손뜨개 스웨터. 그 모든 것이 엄마의 손끝에서 나왔고, 지금 돌아보면 그건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엄마가 표현할 줄 몰라 행동으로 보여준 사랑의 방식이었다. 이제 50대가 되어 내 아이들을 키워보니, 그 하나하나가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다는 걸 안다. 밥 한 끼에도 정성을 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이가 아플까 밤새 뒤척이는 마음이 어떤 건지, 아무리 피곤해도 자식 앞에서는 무너질 수 없는 그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이제야 뼈저리게 느낀다. 그토록 단단하고, 조용하고, 흔들림 없던 엄마의 모습은 단지 성격이 그런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태도였다는 걸 깨닫는다. 어릴 땐 가끔 투정도 부렸다. “왜 엄마는 늘 희생만 하세요? 왜 본인을 위해 살지 않으세요?” 그땐 몰랐다. 사랑이란 것은 줄수록 더 커지는 감정이라는 걸. 자기 시간을, 꿈을, 몸까지도 내어주면서도 아깝지 않은 마음. 엄마는 그런 사랑을 매일 밥을 지으며, 빨래를 널며, 도시락을 싸며 보여주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엄마의 사랑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는 내가 그 자리에 있다. 누군가를 위해 매일 밥을 차리고, 출근길 문 앞에서 “조심히 다녀와”를 반복하며, 아이가 아프면 내 일보다 먼저 걱정하게 되는 나. 예전의 엄마처럼, 나도 내 자식을 위해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내 부모님을 떠올리며 뜨거운 눈물을 삼킨다. 사랑은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엄마가 매일 해주던 밥 한 끼, 밤새 꿰매던 아이 옷, 새벽마다 들리는 조용한 부엌 소리 안에 있었다. 지금 나는 그 사랑의 의미를 알아간다. 사랑은 결국, 사소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자란다는 걸. 그리고 그걸 알아차리는 데에는, 어쩌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삶의지혜 : 친정엄마에게서 배운 생활 철학
엄마의 말 한마디가, 인생을 버티게 한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있는 거야.” 친정엄마는 인생의 굴곡을 담담하게 한 줄로 정리하곤 했다. 젊었던 나는 그 말이 마치 포기처럼 들려서 속이 답답했다. “왜 그렇게 체념하고 사세요?” 반문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 또한 인생의 언덕을 넘어가다 보니, 그 말이 단순한 위로나 체념이 아니라, 깊은 통찰과 균형에서 나온 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엄마는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말보다 더 많은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없는 살림에도 자식들 앞에서는 늘 환하게 웃었고, 힘든 상황에서도 남과 비교하거나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찢어진 옷을 기워 입히고, 시장에서 세일하는 채소로 정성껏 밥을 차려주며,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사랑으로 채워주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당연한 듯 살아가는 모습에서 나는 진짜 어른의 모습을 보았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 없이 나가는 나를 보며 “우산 없으면 그냥 맞으면서 가”라고 웃던 엄마. 그 말 속에는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괜찮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작은 불편함에 집착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 그것이야말로 인생을 덜 흔들리게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걸, 엄마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으로 가르쳐주었다. 이제 나도 중년이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흔들린다. 급변하는 세상, 예측할 수 없는 현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간관계 속에서 좌절하고 지칠 때, 문득 떠오르는 건 엄마의 말 한마디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는 거야.”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단순한 진리가, 나를 다시 일으킨다. 흘러가는 대로 흐르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며, 기대는 내려놓고 감사를 붙드는 태도. 그것이 엄마에게서 배운 삶의 자세다. 엄마의 지혜는 오래된 말처럼 들리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더욱 절실하다. 속도와 성과만이 강조되는 시대에, 조용히 중심을 잡고 버티는 힘. 급한 일엔 침착함을, 힘든 일엔 인내를, 좋은 일엔 감사함을 갖는 자세. 이제는 그 말이 나의 철학이 되었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이 또한 지나갈 거야.”
중년성장 : 친정엄마 덕분에 성숙해지는 나
중년, 엄마를 닮아가는 시간 20대와 30대는 늘 분주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썼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 밤늦도록 일하고, 성과와 목표에 목을 매며 "더, 더"를 외치던 시간. 그 시절에는 성공이 전부였고, 외적인 성취가 내 삶의 가치를 증명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50대가 된 지금,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전혀 다른 것이 보인다. 어느 순간부터 번듯한 직함보다 중요한 것이 가족과의 대화이고, 넓은 집보다 소중한 것이 건강한 몸과 마음이며, 화려한 자리가 아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용한 깨달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친정엄마가 있다. 엄마는 단 한 번도 '성공'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기력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다. 늘 이른 아침 가족의 아침밥을 챙기고, 동네 마트에서 알뜰하게 장을 보고, 마주치는 이웃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던 삶. 손에 쥔 것은 많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넉넉해 보였다. 작은 들꽃 하나에도 “예쁘다”며 미소 지을 줄 알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 하나에도 “이만하면 충분하지”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엄마의 삶이 나는 한때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왜 그렇게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사시냐고, 왜 더 큰 꿈을 꾸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삶은 반드시 거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열심히 하루를 살아내고, 감사할 줄 알고, 곁에 있는 사람을 아끼는 것이야말로 진짜 의미 있는 삶이라는 걸. 친정엄마의 삶이 그 증거였다. 중년이 되면 몸도 예전 같지 않고, 마음도 쉽게 흔들린다. 작은 일에도 지치고, 때론 이유 없이 허무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를 떠올린다.
아무리 힘든 날도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고, 삶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담담히 받아들이던 엄마. 그 모습을 마음속에 떠올리면, 나도 다시 한 발 뗄 용기가 생긴다.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중년의 성장은 거대한 변화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삶을 사랑하려는 노력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친정엄마처럼 사소한 것에 감사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는 의미임을 깨닫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처럼 앞만 보고 달리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묵묵히,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밟아간다. 엄마가 그러했듯이, 성공보다 평화를, 성과보다 사랑을 선택하며.
50대가 되어 돌아보니, 친정엄마는 내 삶의 가장 큰 스승이었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 가족에 대한 사랑, 소소한 일상 속에서 배운 삶의 지혜, 그리고 인생을 성숙하게 살아가는 방법까지. 엄마의 삶은 교과서보다 훨씬 깊고 진한 가르침을 남겼다. 지금 내 곁에 엄마가 있든, 하늘나라에 계시든, 그 사랑과 가르침은 여전히 내 삶을 이끌어 준다. 이제는 나도 엄마처럼 내 삶을 사랑하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 모두, 친정엄마의 삶 속에 깃든 지혜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자신의 삶에 아름답게 녹여보자.